이광주. 담론의 탄생
왜 하필 카페이며 살롱, 클럽일까.
그간 역사란 필경 문화의 이야기, 문화의 흐름이라는 생각을 간직하면서 독일 및 유럽의 교양계층ㆍ교양문화를 연구 주제로 설정하여 내 나름대로 유럽 문화에 접근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럽 문화 또는 문명을 다른 문명권과 본질적으로 구별 짓는 특징의 하나로 고대 그리스 이래의 자유로운 담론문화의 전통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담론문화는 머리말에서 지적하고 본문에서 밝혔듯이 근대적 언론의 자유와 의회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선진 유럽 사회와 문화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자유롭게 말하는 인간이 존재했다. 그 가장 바람직한 모태와 요람, 진정한 토포스는 바로 살롱과 클럽과 카페로 생각된다 -
<담론의 탄생>, 이광주 지음
자유로이 이야기 하는 그룹들의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담론이라는 것이 이뤄지며 많은 사람들의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교양인 에스프리를 강조하며 귀부인들이 살롱을 만들었고 영국에서는 신사들을 빙자하여 부인의곁을 떠나 클럽을 만듭니다.
자유로운 대화와 주제의 풍성한 대화가 이뤄지면서 작가가 모이고 생겨나고 배우가 모이고 생겨나고 각 모임속에 인물이 들어올 뿐만 아니라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앞에서 살롱과 관련하여 인간성에 뿌리박은 보편적 지성, 프랑스적 에스프리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계층과 신분, 종파와 정파를 가리지 않고 한자리에 모여 갖가지 이야기와 담론을 즐긴 살롱 문화를 요람으로 발전하여 프랑스 문화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음을 이해했다. 기쁨으로서의 담론을 즐긴 사교의 세계, 거기에는 여인이 크게 자리 잡았다.
영국의 클럽은 신사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커피하우스가 싫어 자신들만의 클럽을 차렸다. 그것도 모자라 정치 클럽을 차려 당파별로 끼리끼리 모였다. 그 밑바닥에 우리는 영국 자유주의를 관통하는 영국인의 지극한 개인주의적 성향이 있음을 본다. 모든 것에 앞서 개인을,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개인주의자인 신사계층은 클럽에서도 가문 대대로 이어져온 귀족 칭호를 쉽게 버리지 못했다. 그만큼 가계家系와 신분에 연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세계 최초의 근대사회와 의회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이 이율배반의 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영국의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전통 지향적인 보수주의자다. 그런데 이 보수주의는 그들의 자연관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유럽에서 영국 사람들만큼 자연을 사랑하고 반듯하게 관찰하는 국민은 없다. 자연 관찰을 통해 그들은 자연의 법칙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고 그것은 그대로 현실세계의 질서에 대한 신뢰로 확대되었다. 모든 영국인이 받드는 로크에서부터 흄에 이르는 경험론은 관찰된 자연과 현실의 경험experience에서 이룩된 철학이었다. 이 철학은 개인의 자연권을 강조한 로크에게서 밝혀지듯이 의회 민주주의 이론의 초석이 되었다.
우리 선비 사대부들의 사랑舍廊과 사랑문화가 떠오른다. 주부가 거처하는 내실ㆍ안채와는 따로 떨어진, 가장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 사랑방. 그곳은 훌륭한 사교장이었다.
배우고 자주 습득하니 얼마나 기쁠쏘냐.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얼마나 기쁠쏘냐.
배움의 기쁨을 강조한 공자의 말씀이다. 우리의 선비는 배움의 기쁨은 서재에서 누리고, 벗들과의 기쁨은 사랑방에서 나누었다. 사방탁자며 문갑, 서가와 경상, 그리고 문방사우文房四友와 다기茶器가 놓인 선비의 고고한 서재. 그 서재와 달리 사랑방에서는 방 주인을 중심으로 남정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시작詩作, 주연酒宴, 때로는 기녀妓女도 함께 어울려 풍류와 운사韻事를 즐겼다. 남성들끼리 편을 짜서 활 재주를 겨룬 편사便射와 마찬가지로 사랑은 여인 금지구역이었다.
독일 살롱의 ‘진정성’이란 무엇일까. 베를린 살롱의 원형은 멘델스존의 독서협회였다. 유대인 출신의 계몽주의자로서 소외된 유대인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그의 강한 소명의식은 대체로 멘델스존을 스승으로 받든 유대인 출신 여성들이 꾸린 살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베를린 살롱은 삶을 즐기는 사교의 터전이나 지적 호기심에 찬 딜레탕트의 유연한 놀이터이기보다는 ‘진실’을 추구하는 동지들의 배움터 성격이 강했다.
이런 모임에도 이면은 있습니다. 앞과 뒤가 있습니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음모와 음행 음지였습니다. 반대가 있고 거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발전의 불쏘시개로 쓰였습니다. 적어도 지금 시대와는 달리 품격이 있었습니다. 반듯한 말씨와 예절을 가졌습니다. 지금의 비속어가 난무하고 절제를 잃은 표현이 판을 치며 대화를 거부하고 자신만을 아는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시대 착오적 국가 주의자들의 생각과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을 무조건 차별하고 압박하는 우리 현실에 담론 문화를 작가는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담론은 결국 서로를 성장시키고 글을 쓰게 하고 작품이 나오게 되는 놀라운 계기가 됩니다.
그 중에는 나치의 정치 압박 속에서도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살롱도 있었습니다.
담론과 대화를 위해 필요한 차에대해서도 얘기가 나옵니다. 육로와 해로로 나뉘면서서 차라는 단어와 티라는 단어로 나뉘어 진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커피는 에디오피아에서 시작 됩니다.
카흐와’qahwa, 아라비아어로 자극적인 것, 즉 커피의 어원을 살펴보면 아라비아어에서 그것은 포도주의 별칭이자 술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커피 또한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도취’ 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지닌 ‘악마의 향기’로도 여겨졌다. 그러므로 커피 반대론자들은 모스크의 밤 예배에서 모두 커피 잔을 돌려 마시는 관행도, 예언자의 성탄일에 커피를 제단에 바치는 예법도 무시했다.
솔직히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사람으로 뭐 이정도로 커피를 찬양하고 두려워 하나 생각이 들 정도인데..아직도 모르겠다.
여하튼 카페는 이스탄불에서 시작됩니다.
이후 카페는 지성인들의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하고, 전쟁에 대한 반란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투쟁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끊임 없이 모이기를 자처 합니다. 함께 모임으로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례함에선 얻을 수 없고 서로를 위한 격려 예의 고상함 지식을 추구하는 모임 가운데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모임을 만듭니다. 그것은 서로의 지식을 키우기도 하고 그 나눈 대화와 편지 가운데 글이 완성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혼자 살아서 될일도 아니고 혼자 죽치고 앉는다고 될일도 아닙니다. 다만 서로 나눌 수 있고 공감할 능력이 있으니 나누고 담론하고 창조해 내고 창의해 내는 과정이 담론이라는 모임가운데 이뤄지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결국 끊임 없는 토론과 의견가운데 나오는 지식의 향연을 만들수 있는 그들의 모임이 부럽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이제는 잃어버린 담론의 의미가 다시금 자기 주장만 가득한 세상 가운데 세워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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