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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서평 132 - 한병철. 관조하는 삶. 김영사

예예파파 2024. 12. 29.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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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관조하는 삶. 김영사
한병철씨의 책은 읽을때 마다 부담 스럽다. 이 분의 다른 책에 이런 부분이 서술 되어 있다. 
이분이 쓰는 책이 교양서적으로 분류 되어 나온단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제는 원본이 출판되는 독일에서는 철학책이다. 
우리나라의 철학에 대한 개념을 알려주는 부분인데, 이건 나도 잘 모르니 넘어간다. 부담이란 부분이 여기다. 
철학적인 관념에서 봐야 하는데 철학을 그래도 접해보고 배워본건 대학원때 2년 남짓이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운터라, 감도 오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최근에 읽었던 분들의 내용들이 나온다. 
그것도 안심이 안되는게 이분 스타일이 자신이 긍정적으로 적었던 철학자들의 개념을 자신의 다른 책에서 깡끄리 뒤집어 버린다. 자신의 논증을 위해서 그런건데 물론 잘 하시니까 그런건데 독자의 입장에선 난감하다. 
열심히 읽었더니 이전에 읽은 책의 내용이 부정당하는 것 같다. 
결론, 이분의 책 읽기가 상당히 상거럽다. 

서론이 길었다.
오늘 읽었던 책은 관조를 얘기 하고 있다. 관조는 무슨 뜻일까 분명히 들어는 봤는데 자주 쓰는 말은 아니다.
아니 관조를 할 만큼 여유 있는 삶을 살지를 못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무위라는 개념을 필요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무위는 무능도, 거부도 한낱 활동의 부재도 아니라 독자적인 능력이다. 무위는 약점이나 결함이 아니라 집약성이다. 
문제는 이 땅에서 쉬이 인정받지 못한다. 단순한 활동의 공백 형태정도로 인식 되고 있다. 안식일 때는 모든 활동을 쉬어야 하는데 무위와 경제 활동의 중단은 안식일 축제를 위해 본질적이다. 반면에 자본 주의는 축제마저 상품화 한다. P9

관조는 여유이고 무위라고도 한다. 무위라는 것은 건강을 위한 금식에 가깝다.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세상속에 살면서 그 치유는 기업에게 상품화 되고 최적화 되고 어떻게든 삶에 채워넣는 무언가가 되었다. 
그 결과로 사람이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한다. 또다른 부작용은 경험하는 능력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저절로 되어지는 것을 보는 능력이 사라진다. 거기서 배울 수가 없다.
관조를 잘하는 명인은 세상의 흘러감을 모방한다. 절로 되어가는 세상속에서 배울 역량을 관조를 통해 배우게 된다. 

무슨 말일까? 발명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세상이 생각지도 못한 일,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으려면 일반 인들에게는 그들의 손짓이 헛짓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은 없는 곳에서 보는 무위를 한 사람이다. 들어본 적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시를 쓰는 것과 같다.
일반 적인 대화와 말은 노동이다. 시는 정보로서 언어의 능력을 다르게 만든다. 쉼이 있어야 나를 돌아본다.
나를 돌아보며 타인도 돌아본다. 선을 긋지 않는다. 자신이 자신이라고 고수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세상과 자신이 자연스래 연결되는 것 그것이 무위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이라 한다. 

일본의 장르 소설 중에 '공의 경계'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인 시키는 물체의 결을 본다. 갈라진 틈을 본다.
그렇기에 거기에 자신의 무기인 단도의 끝을 갖다 대기만 해도 결대로 잘라진다. 원래 갈라지게 되어있는 결이라 그렇다. 소설 설정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요리를 하는 분들이 있다. 그렇기에 칼을 바꾸지를 않는다. 능숙하게 결대로 잘라낸다.
장자는 이 일을 단지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는 일을 할 뿐이라고 한다. 되어지기로 작정된 일이다.
실제 사람들은 자연에 개입을 많이 한다. 그러면서도 그 개입을 통해 일어나는 상처를 회복시킬 줄 모른다. 되어진대로 쓸줄을 몰라서 그렇다. 자연을 어떻게 회복하는가? 내버려 두면 된다. 그러면 저절로 회복된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 만을 쳐다보고 있을때 무위라는 것을 그 이상을 본다. 항상 이미 있는 곳으로 데려간다. 
존재하는 것에 우리를 넘겨주는 것으로 간다. 
이것은 우리가 무조건 행동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 여유를 가지고 관조해야 함을 알려준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좋아하기와 사랑하기로 출발하라 얘기한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을 행위로 일궈나가는 것이 일이라면, 좋아하기 사랑하기로 출발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향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본질을 끄집어 낼 수 있는 행동이라 한다. 왜 우리는 이런 본질을 꺼내보지 못하나?

우리는 디지털화 정보화를 시대의 발전이라고 추앙한다. 
하지만 아날로그로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속 영원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불멸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시간을 쪼갠다고 영원을 볼 수 있을까? 극단적이고 덧이 없다. 존재라는 것은 느림과 오램 안에서 성장한다. 
디지털 같은 0과 1의 경계는 존재의 개념을 소멸시킨다. 
우리가 존재 곁에 아날로그식으로 오래 머물때에 존재의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우리는 그 개념을 단순히 시간의 압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개념은 오랫동안 그 시간을 창조한 존재와 함께 할 수 있는 관조의 능력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라보기라고 말하는 그것. 오랫동안 여유롭게 바라볼 줄 아는 능력.

그렇기에 유대교에서 말하는 안식일의 개념은 사람의 사는 역사가 행복한 무위에 이르러 거둬진다는 것이라 한다. 
단순히 인간이 창조 되어서 창조 행위가 아니라 안식일의 쉼이 비로서 창조를 완성한다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쉬셨다. 
15년의 일을 그만두고 쉬고 싶다. 남들은 걱정한다. 돈이 벌 수 없어서, 해야 할 일이 없어서, 힘들지 않겠느냐고,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창조와 이어지는 바라보기가 없었던 15년보다 지금의 쉼이 더 값지다. 고 말할 수 있다면 놀래려나?
쉼조차 나에게 계산이 되어선 안된다. 그건 관조가 아니고 무위가 아니다. 창조가 없다. 
일을 그만 둘 수 없다면 잠시 손을 내려놓고 흘러가는 시간 가운데 자신을 내어 맡겨보았으면 한다. 
그것이 관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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