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어머니의 과 보호속에서 자랐었다. 지금에서야 부모의 과보호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 사회 이슈거리도 안되지만 내가 어릴때에는 부모님도 바쁘고 아이들도 놀거리가 없어 방황하던 시기라 1대1로 붙어서 첨삭지도를 받는 유치원생 국민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시험공부도 혼자 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검사를 받아서 달달외우거나 결과를 보여주어야 했고 시험문제에 하나 이상만 틀려도 혼나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조그만 국민학교를 다녔었지만 올만점에 늘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은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학교에서 싸우거나 다치거나 일이 날때도 항상 어머니가 막아주시고 처리하고 한 것을 등뒤에서 보고 자라놓으니 그 당시엔 생각 없이 그냥 맡기면 되어서 좋았을 것 같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정말 나를 바보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움직일 줄 모르고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고 스스로 어울릴 줄 모르는 아이였다.
내가 일을 치더라도 누군가 알아서 해주겠지 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 조차 없었다. 뭘 할 의욕이 없었다. 내 스스로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학을 갔어도 어울리거나 말을 잘 하지 못해서 오해를 받거나 싸우거나 아니면 멸시를 받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후에 중학교를 가고 뭔가 이상한 흐름이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오르면서 뭔가 느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렸던 나는 그런 것을 신경쓸만한 감각도 없었고 그게 뭔지도 몰랐다. 같이 발표를 해야 하는데 발표자가 나이기에 혼자 열심히 발표하고 칭찬은 혼자 다들었다. 그 당시 함께 발표준비를 했었는지 아닌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옥상위에 올라가서 친구들이라는 하는 녀석들이 윽박지르고 한 것을 보면 제대로 각자 맡아서 준비를 한 것 같지는 않다. 그 친구들 입장에서는 나 혼자 점수를 다 가져간것 처럼 되었던 듯 하다. 기억이 제대로 나야 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조금 억울하네..
내 삶에 뭔가가 배제되었 있다는 것이 느껴지긴 했는데 여전히 나는 그것이 뭔지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누군가와 친해지고 그룹을 이루고 그 그룹끼리 함께 다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게 깡패들이나 힘좀 쓰는 친구들의 모임이든 밥을 같이 먹는 모임이든 마음이 맞는 이들의 모임이든 뭔가 뭉쳐서 다닌다는 개념이 나에게 생기기 시작했고 그러는 가운데 지금까지 없었던 사회 속에 나라는 것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내가 존제하고 내가 서있고 내가 공부하고 있는 장소에 나 외에 다른 이들도 존재하는데 이 존재들이 나의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는 않는다는 개념이 겨우겨우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하고 왜 그것들의 개념이 그제서야 생겨나기 시작했는지 그당시에도 알지 못했고 뭔가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이나 내 목숨이 그냥 붙어 있으니까 사는 것이라는 생각들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었다. 나에겐 사춘기라는 개념도 사치였다. 그런 것이 생기려면 공동체, 그룹이라는 개념부터 생겨야 하는데 나는 아예 없었으니까. 고등학교를 다니며 동아리 활동이라는 것을 하고 중학교때까지 그냥 취미삼아 그리던 그림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함께 그림 그리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이 공동체와 유대감이라는 것이 겨우겨우 생기기 시작한 듯 싶다.
공동체에 대한 감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더욱 생긴 듯하다. 운전은 대학교 들어가기전에 배워야 한다 라는 말을 어디서 들으면서 운전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알게된 한 누나가 대학교 들어가면 기독교 동아리는 꼭 IVF들어가라고 추천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그 누나의 이름도 모습도 다 잊어버렸지만 지금도 드는 생각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 동아리에 들어감으로 인해서 내인생의 반은 먹고 들어간 것이 많으니까..그곳에서 중학교때 친구였던 한종욱이란 친구도 만나게 되었고, 한 자매를 짝사랑 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나를 두고 얼마나 사랑하고 애닳고 있었는지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도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한종욱이라는 친구가 나중에 소개시켜준 자매가 지금의 내 아내이다. 다른 표현도 어렵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외에는 답이 없었다.
IVF라는 곳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 주는 곳이다. 군대에서 제대로 공동체를 배우기 전에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지를 배운 곳이다. 하지만 여전히 헌신에 대한 개념은 힘들었다. 교회를 다니면서 선교단체까지 감당하기에는 영적 체력이라든지 감정체력의 낭비가 심했다.
맏이로 자라고 누군가에게 기대오다가 누군가의 기대를 받고 산다는 것이 참 피곤했다. 선교단체 내에 있던 누나, 즉 여선배들은 나에대한 기대가 컸는지 다른이 보다 배로 기대와 칭찬과 콜링을 했고 남의 기대를 져버리면 안될 것 같은 부담감에 계속해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주기 위해 움직이던 나던 몸과 마음이 지쳐서 그 선교단체를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난리가 났었다. 선교단체에서는 그래도 잘 키웠고 리더감이었는데 누가 저렇게 되도록 나두었냐...나중에는 관리 소홀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저애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안심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지 않았나 생각도 들지만.
나중에 더욱 내가 선교단체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된 계기가 생기게 되었는데 각 대학 지부를 맡고 있는 선교단체에 간사님이라고 리더가 있는데 그 간사님이란 분이 나에게 실망했다고 빨리 돌아와서 사과를 해야 안되겠냐고. 이런 말을 여선배에게 듣게 된 것이다. 아무리 내가 공동체 의식이 없고 그렇게 살았지만, 실컨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 놓고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았다.
신앙인은 교회 중심이 되어야 되고 선교단체는 교회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곳에 세워진 일종의 파송단체 개념이다. 그런데 그 선교단체에서 뭔가 엄청난 적을 두지도 않고 실제로 맘다해 정성다해 할 열정도 없는 사람 그렇게 괴롭혀 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정의를 내리는 자체가 너무나도 역겨웠다. 게다가 내 속에는 그들을 향한 신앙으로서의 진실됨이 없었던 것이 더 컸던 것 같다. 그저 오냐 오냐 해주니까, 아 좋은 곳인가? 이런 생각?
결국 그 간사님이란 분은 소천하셨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이다. 선교단체는 선교단체의 위치와 정의를 제대로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세를 불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목적인 예수를 학생들에게 전하는게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급, 교회를 그만두게 하고 기존 교회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정죄하고, 자기들끼리 뭉치게 하는 것은 이미 그 안에 밸런스가 깨졌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들만의 욕심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동체라는 개념이 세워져 갈때 즈음에 나는 군대를 가게 되었다. 오히려 공동체란 개념은 군대에서 바로 세워진 듯 하다. 이권이냐 욕심이 없는 순수하게 모이기 위해 모인 단체 그 안에 신앙이 들어간 단체를 만났었던 것 같다. 고댄 군대 생활 가운데서도 자신안의 믿음이라는 것을 지켜 보겠다고 발버둥 쳐본 이들의 모임이 군 안에서의 모임이었다. 그리고 이전 글에도 적었지만 그분들 덕에 나는 많은 위기를 넘겼었다. 결코 자신의 욕심에 물든 단체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람이 모인 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내가 위주가 되려고 하면 결국 그 단체에는 욕심이 끼어든다. 그러나 욕심이 아닌 신앙이 중심이 된다면 그 신앙이란 것이 욕망으로 인해 변질 되지만 안든다면 그게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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