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때 그림이라는 취미에 빠져 열심히 여러가지 활동을 한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집에서는 적어도 지방대는 가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했었으나 그당시에는 인지도가 한의학밖에 없었던 동의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나마 학과는 그 당시 한참 잇슈가 되었던 멀티미디어 공학과를 들어가게 되었다. 컴퓨터나 그래픽 방송 게임쪽에 관심이 있었기에 즐거이 공부할 수 있었고 게임디자이너라는 꿈을 꾸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변화는 군대가기전에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던 말레이시아에 잠시 머물면서였다. 말레이시아에 머무는 동안 외지에서 오래 머물려면 비자를 잠시 갱신을 해야 될때가 오는데, 마침 그때가 되어 갱신도 할겸, 리프레쉬도 할겸 가족끼리 말레이시아 근처에 있는 싱가포르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뜬금없는 얘기가..몸도 마음도 굳어지게 했다. “너 신학대학 가볼래?“였다.
한번도 그런생각 해 본적 없고 목회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나였기에 얼떨결에 싱가포르 국제 신학대학의 건물앞 까지 가보게 되었다. 한번 들어가서 소개 받아 보라는 말에 건물에 입구에 섰던 나는 나도 모르게 덜덜 떨고 있었다. 마치 이 건물을 들어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을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모태신앙으로 자랐고 책을 자주 읽는 터라 어머니께서 읽으시던 신앙서적도 뭔가 하고 읽고는 했었는데, 순간 그 책의 내용들이 갑자기 머릿속을 휘집어 놓기 시작했다. 목회를 시작해서 엄청 고생을 하며 주께 원망하며 살아가다가 회복된 목사님들의 이야기. 온갖 핍박속에서 개척을 하는 목사님들의 이야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상처를 입어 처절하게 부르짖던 그들의 이야기들이 송곳이 되어서. 나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겨놓기 시작했다. 벼랑 끝에 내 몰린 느낌이었다.
대단하신 그분들이야 그런일을 감당했지. 나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예배만 대충 드릴 줄 아는 자가 무엇을 하겠단 말인가. ‘남들 다 갔다고 하는 주일학교도 제대로 해본 기억이 없는데’하며 나는 결국 입구에서 췩 돌아섰다. 뒤도 안돌아보고 돌아섰다. 그 당시의 두려움은 지금의 내가 생각해 봐도 참 기이한 것이었다. 그 정도로 두려워 할 일도 아닌데 그저 안에 들어가서 확인해보고 어떤 곳인지 알아보기만 해도 될 일이었는데. 마치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하나님이라는 신의 큰 손이 나를 목사라는 자리에 앉혀놓고 괴롭힐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나의 누적되어 있던 교만함 오만함이 나를 사로잡아서 그것이 반대로 다시는 나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나타났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결국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소득이 없이 말레이시아에서 머물고 놀다가 군입대를 준비하려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군대 갈 시간이 다 되었으니 군종병으로 들어가보라는 얘기였던 것 같다. (어머니, 그거 엄청 빡세거든요...)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부모님이 안계시고 아무도 없었던 집을 놔두고, 큰집에서 머물면서 빨리 군에 들어가겠다고 그 당시는 지원제에 시험까지 쳐야 했던 공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일반 육군보다 훨씬 복무기간이 긴 공군에 들어가서 며칠이 지난후에야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디에 가든지 분명히 무언가 말씀하실 것을 얘기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군에서 이전에 바깥세상에서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것들을 배우게 하셨다. 군에서 지낸 일들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따로 적어 보려고 한다. 다른 분 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수준에 파란만장한 생활을 했었던 듯 하다.
군에서 제대 한 후에 생각을 한 것은 예배드릴 교회를 찾는 것이었다. 원래 예배를 드리던 교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군 복무중에 어처구니 없는 일로 인해 그 교회를 나오게 되어 새로이 교회를 찾게 되었다. 주일학교도 제대로 체험해 보지 못한 터라 청년들이 모여 있고 뭔가 공동체를 누릴 수 있는 교회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사직동 교회와 수영로 교회 두 교회중에 고민하다가 수영에 있는 수영로 교회로 가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때에도 이미 새성전이 만들어 진터였지만 대학부 만은 여전히 수영에 있는 본관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수영로 대학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련회도 하고 임원도 하며, 단기선교도 몇 번씩 가게 되면서 ‘아, 이게 공동체에서 예배를 드린 다는 것이 가능한 것이구나’라는 개념을 어렴풋이 알아가게 되었고 군대에서 조금씩 키워나갔던 신앙이라는 것을 잡아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저렇게 부딪쳐 가며 배우는 과정 가운데 한 개의 전환점이 또 왔다.
대학부 내에서 인터콥이라는 단체에서 한 선교사님을 강사로 세우게 되었다. (지금은 참 껄끄러운 단체이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 당시에 무슨 말을 들었었는지, 다른 것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데 하나 그분이 한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세계속 열방 보다 기도하는 골방의 크기가 더 크다’ 라는 말이었다. 그 수련회를 통해 나는 기도로 섬기는 자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 기도를 선교사님과 섬기는 목사님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바탕가운데 평생에 말씀으로 삼은 마태복음6:33절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는 말씀과 함께 나는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을 한다. 기도로 돕는 선교를 하다가 가는 선교에 맘을 먹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그런 결정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주일 예배 가운데 그 당시 수영로교회 담임목사님인 정필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그분의 말씀이 이랬다.
”선교사가 되려면 그래도 목회적인 마인드가 있어야 돼. 그런 목회 공부도 없이 어찌 가려고? 나가려면 목회를 배우고 가~“ 마치 나에게 하는 말씀인 듯 머릿속에 박혔다. 결국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체 신학교에 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산뜻하게 어이가 없다. 너무 천편일률적으로 쭉쭉 진행된 이야기라 두서도 없다.
그런데 이게 또 내가 살아온 방향이고 지금 나를 있게 하는 과거가 아니던가..조금 후회 되는 것이 있다면, 그래도 외국에서 영어로 선교나 신학을 공부해 보고 한국에서 신학을 했다면 조금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있다. 교회의 크기가 작던 크던 내가 쫓겨났던 아니던 신경쓰지 않고 나의 색을 갖추어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 신학교를 졸업한 것 조차 지금은 뭔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앞으로의 삶을 위해 조금더 신중하고 더 많이 순간순간 배움을 잃지 않는 인생이길 바래 보며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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