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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폭군으로 몰려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광해군의 실리 외교는 백성들을 전화(戰禍)에서 구해냈다. 명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후금과의 전쟁에 원병을 요청해오자,광해군은 강홍립에게 1만명의 병사를 주어 보냈다. 그러나 강홍립은 후금과 싸우는 척 하다가 투항해 화의를 맺었다. 조선의 대신들은 강홍립이 역적이라며,그 가족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오히려 가족들을 돌보아 주었다. 강홍립의 투항은 광해군의 책략이었다. 후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나아가 침략을 예방하게 되었다. 국제정세를 읽을 줄 아는 지도자의 안목이 돋보인 대목이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왕위에 오르니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조선은 패전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을 공공연하게 보호해주었다. 1627년 후금의 3만 군사가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선은 서둘러 화친을 맺었다. 1636년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의 사신 용골대가 군신관계와 과다한 조공을 요구해 왔다. 조선 조정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 않다"며 전쟁 불사를 주장하는 척화파(斥和派)가 득세했다. 인조는 평안감사에게 청의 침입에 대비하라는 교서를 보냈는데,그 교서를 달아나던 사신 일행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해 12월 청 태종이 12만 군사를 이끌고 다시 침입했으니,바로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에서 버틴 지 40여일 만에 인조는 한강 나루터인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번 절하면서,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는 항복 의식,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렸다. 3년 후 그 치욕의 현장에 청 태종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세워져,약칭 삼전도비(三田渡碑)라 불려왔다.
며칠 전 이 비석에 철거를 요구하는 페인트 낙서가 쓰여졌다. 역사 왜곡을 일삼는 중국에 대한 항의의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지울수도 없으니,준엄한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산일보- 박병곤 논설위원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왕위에 오르니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조선은 패전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을 공공연하게 보호해주었다. 1627년 후금의 3만 군사가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선은 서둘러 화친을 맺었다. 1636년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의 사신 용골대가 군신관계와 과다한 조공을 요구해 왔다. 조선 조정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 않다"며 전쟁 불사를 주장하는 척화파(斥和派)가 득세했다. 인조는 평안감사에게 청의 침입에 대비하라는 교서를 보냈는데,그 교서를 달아나던 사신 일행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해 12월 청 태종이 12만 군사를 이끌고 다시 침입했으니,바로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에서 버틴 지 40여일 만에 인조는 한강 나루터인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번 절하면서,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는 항복 의식,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렸다. 3년 후 그 치욕의 현장에 청 태종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세워져,약칭 삼전도비(三田渡碑)라 불려왔다.
며칠 전 이 비석에 철거를 요구하는 페인트 낙서가 쓰여졌다. 역사 왜곡을 일삼는 중국에 대한 항의의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지울수도 없으니,준엄한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산일보- 박병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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