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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욜의 짧은 서평 22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예예파파 2023. 7. 12.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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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해석학이라는 명칭 안에 전령사 헤르메스의 이름이 섞여있는 것은 해석이라는 행위의 본질이 전달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보입니다.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면서 전달하는것 잠재적인 유에서 현실적 감각적 논리적 유를 창조해냅니다. 
더 좋은 해석 덜좋은 해석의 차이는 생산된 인식의 깊이 입니다. 해석으로 생산된 인식이 심오하면 그 해석은 거꾸로 대상작품을 심오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입니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해석자는 가장 좋은 해석을 꿈꿉니다.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과연 어띠까지 섬세해질 수 있는지 궁금하기에 상상할 수 있는한 섬세한 사람이 되어보기 위해 실험을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생각에서 2012년 부터 2014년까지 영화주간지 씨네21에 실린 글을 묶은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과 함께 토론하며 적은 글이라 더 특별한 책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을 해석하며 네가지로 나누었는데 
사랑의 논리, 욕망의 병리, 윤리와 사회, 성장의 의미에 대해서 논합니다. 
각 영화에서 나타내는 얘기를 이렇게 깊이 있게 얘기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심도있게 글을 보아야 하고 생각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특히나 이전에 읽은 이분의 시에 대한 책은 조금 어두웠다면 이 책은 조금 밝은 분위기와 현실의 진지함에 대해 논해서 같은 작가지만 새로운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떤 구조 속에서 A는 B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어떤 조건이 갖춰질때 B는 A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하는가 이것은 그 누군가가 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되는 일이다.
나라는 존재 내부의 결여를 생각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내 안을 들여다 보면 서서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데 커지거나 작아지고 비어있다 채워지고 내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끌게 된다. 이것이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다. 우리는 모든 우연을 다 통제 할 수 없기에 이것도 우연중 하나일 수 있다.  결국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인 나도 너를 사랑해의 속뜻은 나는 결여 되었어라고 결론을 낸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떄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 지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해서 다른 문장으로 바꾸어 쓸수 없는 문장을 정확한 문장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사치로만 존재 합니다.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 목하면 정확하게 상대방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고통을 느끼며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다 말합니다. 
로렌스 애니웨이라는 영화는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의 벅참을 찬미하는 낭만적 열기와 그일이 자기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이 있습니다. 
블루라는 영화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소수자라는 사람들의 사랑을 얘기할때 그냥 그들이라고 짧게 얘기하는 것 보다 그들만의 특수성, 왜 그리 되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 질 수 있나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것을 더 정확한 영화라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욕망에 대해 얘기할때 복수한 실패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욕망에 휘둘려 복수를 꿈꾸지만 하나는 방법 하나는 대상이 잘못되어 실패합니다. 실패의 독창성으로 영화가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욕망은 결국 결핍에 대한 반증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것의 악순환을 끊어 내기 위해 구원이 필요한데 예수가 말했듯이 원수를 사랑하고 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돌려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욕망은 자기 안의 상처를 씻는 하나의 행위로도 나옵니다. 남편에게 받은 상처를 다른이와 관계를 가지면서 잊으려고 하다가도 그 상처가 씻기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성직자를 만나 얘기를 한다던지, 
자기의 욕망으로 인해 잃어버린 아들의 성의 매개체를 자신의 것으로 채우고 자기의 욕망의 시작도 주지만, 원래 자기의 것 즉, 아내가 아들에게 매달리자 다시 그 성의 매개체를 가져 오는 것도 인간의 알수 없는 욕망의 처절함을 표현하는 영화의 한방법입니다. 
결국 감독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욕망으로 인해 살아가지만 그 욕망의 결과에 대해서 어찌 알바가 없기때문에 표현해주는 것이 자기들이라고 얘기합니다. 

윤리와 사회를 얘기할때는 종교적인 색체가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성이라고 하지만 종교를 통해 합리적 부조리가 됨을 대부분의 영화는 꼬집습니다.  광기의 지옥이라 하지만 이성의 지옥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과연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인간의 서로의 구원성을 얘기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는 의미 없다 왜냐면 우리가 진리가 뭔지를 모르기 떄문이다 라고 결론이 나기도 합니다. 
영화 도가니와 영화 시에서 얘기하는 것도 역사를 모르고 시에 대해 모른다면 그저 윤리적인 문제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속죄에 대해 다루는 것을 역사를 알고 시를 알게 됨으로 보게 되는 관점에 대해 얘기 하며 참..영화를 보는 것도 힘들게 봐야하나 생각도 듭니다. 

결국 우리는 성장의 의미를 두어야 한다 말합니다. 사실 성장 영화는 3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소년이 성장한 이야기, 한소년이 성장한 이야기를 재 해석한 이야기,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믿을 것인지 아닌지 결정하게 하는 이야기.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영화속에 장면을 보며 그들이 성장하는 것을 우리의 삶과 비추어 성장시킵니다.  일상의 소중함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식으로건 나를 다시 낳는 것 다시 재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살아온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감정에서 도망치기 위해 성장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작가는 20개가 넘는 영화의 선과 선 사이에서 하나의 사랑을 얘기하려 합니다.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 어떤 것을 표현하고 제대로 된 영화속 이야기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얘기하고 싶어 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리 표현합니다. 충격적으로 탁월하고 놀라우리만큼 심오하다고..
이정도의 칭찬을 들었다면 영화에 대해 정확한 사랑을 표현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저는 미친 사람이 미친 영화를 미치도록 표현했다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듭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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