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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서평 209 - 천선란.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허블

예예파파 2026. 3. 9.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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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좀비 소설인데, 이렇게 따뜻할 줄 몰랐다 — 천선란,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키워드: 천선란,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한국 SF 소설 추천


좀비물은 보통 공식이 있어요.

극한의 공포, 살아남기 위한 사투, 인간성이 무너지는 과정. 장르가 주는 자극은 분명하지만, 읽고 나서 오래 남는 게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를 펼칠 때도 그냥 그런 이야기겠거니 했어요.

근데 이 책은 달랐어요.

천선란은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후, SF 장르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이 됐어요. 소외된 존재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이 소설에서도 그 결이 그대로 살아있어요. 좀비라는 설정을 빌렸지만,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걸린 문장이 있어요.

남주 묵호가 뜬금없이 말해요. "붕어빵맨 같은 건 없을까?" 옆구리 터져도 맛있고, 늘어붙어서 탈수록 인기 많은 붕어빵. 뭉개져도 속이 꽉 차 있으면 장땡이라고. 그리고 호빵맨처럼 제 얼굴을 떼어 사람을 구하는 붕어빵맨을 상상해요.

처음엔 귀엽다 싶었어요. 근데 읽다 보면 이 비유가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요.

핵심은 "터졌는데도 맛있다"가 아니에요. "터졌기 때문에 속이 드러난다"예요.

우리는 보통 멀쩡한 표정, 흠 없는 관계, 문제없는 내일을 안전이라고 믿잖아요. 그런데 좀비가 나타난 세계에서 그런 것들은 금방 무너지는 것들이에요. 끝까지 남는 건 완전함이 아니라 견딘 흔적이에요. 절체절명의 순간, 옥주가 묵호의 옆구리 상처를 보며 중얼거려요. "지금 보니 터진 옆구리 같네." 이 짧은 문장이 슬픈 농담처럼 들리면서도 따뜻하게 울리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상처를 망가짐으로 읽지 않고, 붕어빵의 터짐에 겹쳐 놓는 거예요. 터지면 속이 나오고, 속이 나오면 가득함이 드러난다는 것 🌿

이 소설의 좀비는 단순한 공포 장치가 아니에요. 소속의 폭력적 기술처럼 그려져요. 좀비는 물어뜯어 자신의 무리를 늘려요. 가장 빠른 연대는 동화이고, 가장 쉬운 소속은 같은 바이러스를 품은 몸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옥주가 하는 말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들려요. "차라리 좀비가 되어 그들과 소속되는 게 속 편하지 않나." 비겁한 유혹이 아니에요. 자유로 버티는 고독이냐, 소속으로 얻는 안심이냐. 이 둘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살아 있는 것 같냐는 질문은, 좀비 세계관을 훌쩍 넘어서요. 숨어 지내는 건 살아도 계속 떨리고, 좀비가 되는 건 안심해도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리는 것. 둘 다 쉬운 선택이 아니에요.

1부 제목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의 결말은 괴물 없는 곳을 약속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렇게 말해요. "여기는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괴물을 품으셔야 해요." 바깥의 좀비만 괴물이 아니에요. 버려질까 봐 먼저 물어뜯는 습관, 소속을 위해 상대를 내 색으로 칠해야 속 시원한 충동, 불안을 덮기 위해 사랑이란 단어를 쓰는 버릇. 그 괴물은 우리 안에서 자라요. 살아간다는 건 그 괴물을 제거하며 존재하는 게 아니라, 괴물을 가진 채로도 사람을 사람으로 지키는 규칙을 만드는 일이에요.

묵호의 붕어빵맨은 희망을 꾸며내는 어린이 만화가 아니에요. 찢겨도 남는 것을 끝까지 믿어보려는 상상이에요. 이 소설의 사랑은 반듯하지 않아요. AI가 말려도, 이성이 아니라고 외쳐도, 옥주는 심장이 멎은 자신의 남자친구를 품어요. 반듯한 사랑은 상황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지지만, 터진 붕어빵 같은 사랑은 찢긴 자리에서 속이 드러나고, 그 속이 누군가의 하루를 버티게 해요.

좀비 소설인데, 이렇게 오래 남을 줄 몰랐어요 ✨

문학적 여운이 있는 장르소설을 찾는 분께 조용히 추천해요.

📌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정보 저자: 천선란 출판사: 허블 장르: 한국 SF / 장르소설 특징: 좀비 크리처물, 인간 연대와 사랑에 대한 성찰 추천 독자: 장르소설에서 문학적 감수성을 찾는 독자, 따뜻한 결말을 원하는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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